이탈리아 주방 브랜드를 비교한 끝에 Arredo3를 선택했지만, 브랜드를 정했다고 해서 바로 계약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우리에게는 신축 아파트의 평면도만 있을 뿐, 주방의 정확한 구조도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주방을 처음 계획해 보는 사람이었고, 어디서부터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그래서 브랜드만큼 중요하게 본 것이 상담을 담당하는 사람의 태도였다.
계약부터 재촉하지 않았던 담당자
Arredo3 쇼룸을 처음 방문했을 때 담당자는 우리가 가져간 아파트 도면을 오랫동안 살펴봤다.
가족은 몇 명인지, 평소 집에서 요리를 자주 하는지, 어떤 크기의 냉장고를 원하는지, 주방에 꼭 필요한 수납은 무엇인지 하나씩 질문했다.
이전까지 방문했던 쇼룸에서는 프로모션 기간이나 계약 조건에 대한 설명이 먼저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이곳에서는 계약보다 우리가 어떤 주방을 원하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이 먼저였다.
나는 당시 주방 위치와 구조가 앞으로도 바뀔 수 있다는 점이 걱정됐다. 신축 아파트 공사가 아직 진행 중이었고, 벽과 설비의 위치도 완전히 확정됐다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담당자는 지금 계약한다고 해서 모든 디자인이 그대로 확정되는 것은 아니며, 생산에 들어가기 전까지 구조와 구성을 계속 조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주방을 언제까지 결정해야 하는지, 실측은 어느 시점에 진행하는지, 최종 주문 후 제작에는 얼마나 걸리는지도 차근차근 알려줬다.
좋은 상담은 예쁜 주방을 보여주는 것보다, 아직 결정하지 못한 사람의 걱정을 먼저 정리해 주는 일이었다.

도면 한 장으로 시작된 첫 번째 주방 설계
첫 상담에서는 아파트 평면도를 기준으로 주방의 기본 구조를 만들었다.
당시 주방이 계획되어 있던 곳은 현재의 주방 위치와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집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오면 정면에 주방이 보이는 구조였고, 주방 한쪽에는 크기가 큰 창문도 있었다.
나는 수납공간이 충분한 주방을 원했고, 가능하다면 큰 냉장고도 넣고 싶었다.
하지만 도면 위에 주방장을 하나씩 배치해 보니 생각보다 사용할 수 있는 벽의 길이가 짧았다.
창문이 있는 부분은 가구를 끝까지 연결할 수 없었고, 냉장고가 들어가면 수납장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래도 담당자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 첫 번째 제안을 보여줬다.
그날 처음으로 평면도 위의 빈 공간이 실제 주방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설계 도면은 가져갈 수 없었다
상담이 끝난 뒤 나는 당연히 그날 만든 설계 도면을 받아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집에서 다시 천천히 살펴보고, 다른 업체에서 받은 제안과도 비교하고 싶었다.
하지만 도면을 인쇄하거나 파일로 받아 가려면 먼저 가계약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방식은 Arredo3 한 곳만의 규칙은 아니었다. 그동안 방문했던 여러 주방 쇼룸에서도 비슷한 설명을 들었다.
업체의 입장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도면을 분석하고 주방을 설계하는 데는 담당자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고객이 그 설계안을 그대로 들고 다른 업체에 가서 더 저렴하게 제작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조금 답답했다.
어느 업체의 제안이 우리 집에 더 잘 맞는지 비교하려면 설계안을 충분히 검토해야 하는데, 검토할 자료를 받으려면 먼저 계약해야 했기 때문이다.
설계를 비교한 뒤 계약하고 싶은데, 설계를 받아 보려면 먼저 계약해야 한다니 순서가 반대로 느껴졌다.
결국 눈으로 보고 기억해서 돌아왔다
계약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완성된 설계도를 받아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상담 화면을 최대한 자세히 살펴봤다.
수납장이 어디에 배치됐는지, 냉장고 옆에는 어떤 장이 있었는지, 상부장은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머릿속에 기억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주방 전문가가 제안한 것이니 그대로 따라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동안 자꾸 의문이 생겼다.
정말 이 구조가 최선일까? 창문 앞의 남는 공간은 사용할 수 없을까? 냉장고를 다른 곳에 두면 수납장을 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설계도를 받아 오지 못한 것이 오히려 내 궁금증을 더 크게 만들었다.

집에 돌아와 직접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결국 집에 도착하자마자 온라인 주방 설계 프로그램을 찾아봤다.
전문적인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벽의 길이를 입력하고, 냉장고와 싱크대, 수납장을 하나씩 배치해 볼 수 있었다.
나는 쇼룸에서 봤던 설계를 기억나는 대로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장을 하나 놓고, 지우고, 다시 옮겼다. 냉장고를 오른쪽에 놓았다가 왼쪽으로 옮겨 보고, 상부장과 키큰장을 늘렸다가 다시 줄였다.
직접 그려 보니 상담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문제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통로가 생각보다 좁았고, 창문 때문에 사용하지 못하는 공간도 컸다. 수납을 늘리면 주방이 답답해졌고, 주방을 가볍게 만들면 내가 원했던 만큼의 수납이 나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주방 상담을 받을 때마다 집으로 돌아와 제안받은 구조를 다시 그려 봤다.
처음에는 단순히 상담 내용을 기억하기 위해 시작했지만, 점점 내가 원하는 주방을 직접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 됐다.
도면을 직접 그려 보기 전까지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주방을 고르는 사람에서 설계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처음 주방 쇼룸을 방문했을 때의 나는 전문가가 만들어 주는 디자인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구조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주방 설계는 예쁜 문짝과 상판을 고르는 일이 전부가 아니었다.
누가 주로 요리하는지,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낸 뒤 어디로 이동하는지, 식기세척기에서 꺼낸 그릇을 어디에 넣을지, 자주 사용하는 물건을 어느 높이에 보관할지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같은 크기의 주방이라도 가족의 생활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설계가 필요했다.
나는 더 이상 쇼룸에서 보여주는 주방을 그대로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실제로 사용할 모습을 생각하며 하나씩 결정하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집 전체의 구조를 바꿔야 하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다.
기존 위치에 계획했던 화장실을 그대로 만들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화장실 위치가 이동하면서 거실과 주방의 위치도 달라졌고, 지금까지 준비했던 주방 설계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첫 번째 설계 이후 최종 디자인이 완성되기까지 주방 구조는 모두 일곱 번 수정됐다.
다음 글에서는 주방 위치가 바뀐 이유와 큰 창문, 부족한 수납공간, 양문형 냉장고 때문에 설계를 계속 수정했던 과정을 기록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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